겨울과 봄의 어느 중간쯤 차가운 봄바람이 불면서 진눈깨비 흩날리는 어느 날 한남동의 갤러리 투어를 하였습니다. 한남동에 갤러리 투어를 가는 날에는 늘 들리는 갤러리들이 있습니다.. 리움, 갤러리 조은, 페이스 갤러리, 리만머핀, 파운드리, 파이프갤러리 그리고 로팍, 메이저 갤러리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작은 갤러리들도 종종 눈에 들어오면 발 가는 대로 들리곤 합니다. 최근에 다녀온 파이프 갤러리는 한남오거리에서 이태원 방향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언저리에 위치하였습니다. 2024년 3월 5일부터 2024년 4월 5일까지 전시 중인 신준민의 White Out은 이전에 송혜교와 현빈이 주연으로 나오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대사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화이트아웃 (whiteout)은 심한 눈보라와 눈의 난반사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을 뜻하는데요, 대사에서 이렇게 풀어줍니다. "화이트아웃 현상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모든 게 하얗게 보이고, 원근감이 없어지는 상태.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세상이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상태.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모르는 상태. 우리는 가끔 이런 화이트아웃 현상을 곳곳에서 만난다. 절대 예상치 못하는 단 한순간, 자신의 힘으로 피해 갈 수 없는 그 순간, 현실인지 꿈인지 절대 알 수 없는 화이트아웃현상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어느 한날 동시에 찾아왔다 (준영 내레이션)". 이 대사를 계속 생각하며 이번 신준민 작가의 화이트아웃 전시를 본다면 또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공유드립니다.
신준민 작가는 이번 전시 작가노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앞으로 만나게 될 풍경들도 특별한 것보다는 평범한 것, 빠름보다는 느림, 이성보다는 감성, 감각보다는 노력을 바탕으로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흰 캔버스에 그려보는 첫 붓질의 설렘을 간직하며" 라고 말씁하십니다.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 어두운데 있다가 빛을 마주하였을 때 보이는 강렬한 빛과 거기서 보이는 빛 번짐, 그리고 이 빛 번짐이 폭죽처럼 터져 보이는듯한 착시효과 등을 연상하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3월의 초봄이면서 아직 겨울은 한기가 있고 또 한국 같은 경우 종종 날아오는 황사와 미세먼지로 인한 흐릿한 날씨들과 이번 신준민 작가의 전시는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아떨어지는데요. 신준민 작가는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마주치는 풍경을 현대적 회화로 풀어내는 작가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 속 파편들로 이루어진 상상의 풍경 혹은 일상에서 발견한 특정 장소의 이미지, 익숙한 길에서 마주한 낯선 순간, 전시된 자연으로 바라본 동물원 등을 주요 소재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를 선보이고 계십니다. 삶 속에서 작가의 시선이 머문 곳과 펴 현의 방법은 변화하는 게 인생의 순리이겠지만, 그 흐름의 중심에는 항상 자연이 있었고, 동물, 인간, 집 등의 이미지가 어우러지기에 작가는 이런 회화를 캔버스에 옮겼습니다.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작가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어두운 밤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여 빛의 흐름과 움직임을 느낀 수 있는 수많은 선을 공간 여기저기에 자유로이 그려 넣어 생동감을 부여하면서 이는 마치 폭죽처럼 터지는 효과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캔버스 전면에 보이는 푸른색이 작가의 쓸쓸하고도 적막한 감정으로 표현되며, 그 위로 회색과 흰색 등의 중첩을 통해 푸르스름한 어둠을 지워 나가는 빛의 여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작가의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적막한 색채의 공간에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자유로운 붓질, 그리고 눈으로 찾을 수 없는 빛의 흐름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각과 정서를 매우 자극하며 쓸쓸하게 접해지기도 하여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신준민 작가의 특별한 회화입니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1998)에서는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다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준민 작가의 풍경에서는 이러한 느림의 태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빠르게 빠르게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화려하며 특별한 일상보다는 스쳐 지나가 버리는 평범하고 사소한 사람, 풍경, 그리고 사건을 캔버스로 표현하는 신준민 작가는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 작가는 느림과 비움으로 해석될 수 있는 풍경을 통해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하려고 하며, 주어진 평범한 일상에서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시간을 보는 이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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